정조유신 제7부 대전(大戰)
35화제47장 이만 사천삼백구
다섯 — 신미년 팔월
이 년 뒤, 그는 그것을 쓰는 명령서에 서명한다.
『대서양동맹 최고전쟁평의회 결의 제1호』 1933년 4월 3일, 워싱턴
— 본 평의회는 조선 제국이 신형 폭발물의 실용화에 성공했다고 판단한다. 우리 자체 계획의 완료 예상 시점은 1939년이다. 즉 우리는 앞으로 육 년 동안 상대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이며, 육 년 뒤에는 대등해진다.
그러므로 본 평의회는 다음을 권고한다. 육 년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하나 — 새는 곳
동맹이 조선의 폭탄을 알게 된 경로는 셋이었다.
첫째, 물리학이었다.
라구 바네르지는 1907년에 케임브리지로 갔다. 그는 조선의 폭탄 계획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실제로 그는 세부를 몰랐다.
그가 한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물리를 전부 발표했다. 논문 백구십일 편. 중성자, 핵분열, 연쇄반응의 조건.
이십 년 동안 서양의 물리학자들이 그것을 읽고 자랐다.
1929년, 케임브리지와 베를린과 시카고의 물리학자 열한 명이 각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우라늄으로 폭탄을 만들 수 있다.
둘째, 전기였다.
조선의 발전량 통계는 공개 자료였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 제국의 발전 설비 용량이 세 배가 되었는데, 같은 기간 공업 생산은 12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전기가 어디로 갔는가.
동맹의 경제 분석관이 이 불일치를 1930년에 찾아냈다. 압록강 상류에 백사십만 킬로와트가 사라지고 있었다.
셋째, 사람이었다.
1932년 여름, 조선 제국 병기국의 하급 기사 하나가 상하이 공동조계로 도망쳤다.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그는 도착 사흘 만에 죽었다. 사인은 폐렴으로 기록되었으나 정황상 방사선 피폭이었다. 재실 근무자였다.
죽기 전에 그는 영국 영사관에서 열한 시간 동안 말했다.
그가 말한 것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 그들은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 세 번째가 나오는 데 열 달이 걸립니다.
둘 — 육 년
동맹의 계산은 냉정했다.
— 조선은 지금 두 개를 가지고 있고 해마다 한두 개를 더 만든다.
— 우리는 육 년 뒤에 첫 번째를 갖는다.
— 육 년 뒤 조선은 여덟에서 열 개를 갖는다.
— 우리가 하나를 가질 때 저들은 열을 가진다. 그것은 대등이 아니다.
— 그리고 조선의 폭탄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약점은 배달이었다.
조선의 폭탄은 무게가 오 톤이 넘었다. 그것을 실을 수 있는 비행기는 항속거리가 이천사백 리였다.
즉 조선은 폭탄을 자기 세력권 안에서만 쓸 수 있었다.
런던에도, 파리에도, 뉴욕에도 닿지 못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싸우면, 우리는 폭탄 서너 발을 아시아 어딘가에서 맞을 뿐이고 본토는 안전하다.
— 육 년 뒤에 싸우면 저들은 그것을 어디에나 보낼 수 있게 된다.
—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셋 — 최후통첩
1933년 4월 17일, 대서양동맹 오국 공동 각서가 서울에 전달되었다.
여섯 개 항이었다.
一. 조선 제국은 압록강 상류 시설을 즉시 폐쇄하고 국제 감독단의 사찰을 받는다.
二. 조선 제국은 보유 중인 신형 폭발물 전량을 국제 감독하에 폐기한다.
三. 조선 제국은 만주, 연해주, 대만, 남양 군도, 인도차이나, 보르네오, 수마트라에서 오 년 이내에 철수한다.
四. 조선 제국은 경위결제망의 운영권을 국제 기구에 이양한다.
五. 조선 제국은 일본에 독립을 부여한다.
六. 위 각 항에 대한 회답 기한은 1933년 6월 30일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
— 본 각서는 조선 국민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 조선이 인류에게 준 것을 잊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조선이 만든 약으로 살아났다. 우리 도시는 조선이 밝힌 방식으로 밝다. 우리 학문은 조선에서 배운 방법으로 서 있다.
— 우리가 오늘 이 문서를 보내는 것은 조선이 준 것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세우려는 것 때문이다.
— 조선은 세계 전체를 하나의 장부에 담으려 한다. 그 장부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 그러나 그 장부에는 칸이 없는 것들이 있다.
— 사람이 자기 땅에서 자기 말로 살고자 하는 마음에는 칸이 없다. 자기 자식을 어디로 보낼지 자기가 정하고 싶은 마음에는 칸이 없다. 남보다 못하더라도 자기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는 칸이 없다.
— 조선은 그것들을 잴 수 없으므로 없는 것으로 다룬다. 악의에서가 아니라 성실함에서 그렇게 한다. 그것이 더 무섭다.
— 우리는 조선보다 못한 나라들이다. 우리는 조선보다 느리고, 어리석고, 서로 싸운다.
— 우리는 그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 측정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조선 의정원은 6월 28일에 회답했다.
두 줄이었다.
— 귀 각서의 여섯 개 항을 모두 거부한다.
— 다만 마지막 문단은 제국 관보에 전문 게재한다.
관보 게재를 결정한 것은 의정원 의장 장인철이었다.
그가 그날 남긴 말이 있다.
— 저 마지막 문단은 우리 백성이 읽어야 하오.
— 저것이 우리가 무엇과 싸우는지 가장 정확히 적어 놓은 글이오. 저것보다 정확한 글은 우리 쪽에 없소.
— 그리고 저것을 읽고도 우리 백성이 싸우겠다고 하면, 그때는 우리가 정말로 싸우는 것이오.

관보가 나간 뒤 사흘 동안, 서울에서 반전 집회가 열렸다.
참가자가 십일만이었다.
넷째 날 새벽에 헌병대가 들어갔다. 사망 이백사십일, 체포 만 사천.
집회 주동자 명단은 통계원 계산기가 뽑았다. 소요 시간은 아홉 시간이었다.
1933년 7월 11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국 전사(戰史)』 제1권 서장, 1953년 편찬
이 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 이 전쟁은 조선이 지고 동맹이 이긴 전쟁이 아니다. 또한 조선이 이기고 동맹이 진 전쟁도 아니다. 이 전쟁은 두 편 다 자기가 지켜려던 것을 잃은 전쟁이다. 그러므로 승패로 서술하면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은 칠 년을 갔다.
1933~1935 — 조선의 여름
첫 이십육 개월 동안 조선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이유는 무기가 아니었다. 정보였다.
조선군은 사단 단위까지 무선 암호기를 갖고 있었고, 후방의 계산원이 그 암호를 하루 두 번 바꿨다. 동맹은 조선 암호를 사 년 동안 하나도 풀지 못했다.
반대로 조선은 동맹 암호를 개전 나흘째부터 읽었다.
제3대 화기(火機) 열네 대가 서울 계산원 지하에서 돌았다. 초당 이천 장. 동맹의 암호기는 톱니 방식이었고, 경우의 수가 조선의 계산 능력 안에 있었다.
1934년 봄, 남중국해에서 동맹 연합 함대가 조선 함대와 마주쳤다. 동맹 주력함이 스물셋, 조선이 열넷이었다.
조선이 이겼다. 동맹 열여덟 척 침몰, 조선 세 척.
이유는 조선이 사흘 전부터 동맹의 항로와 진형과 사격 계획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5~1937 — 무게
그리고 무게가 왔다.
1935년 동맹의 월간 항공기 생산은 사백이십 대였다. 조선은 사백구십 대였다.
1936년 동맹은 천백 대, 조선은 오백사십 대.
1937년 동맹은 이천팔백 대, 조선은 육백 대.
조선의 비행기가 더 좋았다. 알루미늄 골격이 가볍고 엔진이 조용하고 조준기가 정확했다.
한 대가 세 대를 잡았다.
그런데 동맹이 다섯 대를 만들었다.
『제국 병기국 월보』 1937년 9월.
— 신들이 아뢰옵니다. 우리 조종사 한 명이 적기 삼 점 일 대를 격추하고 있사옵니다. 이는 개전 이래 최고 기록이옵니다.
— 그리고 우리 조종사는 평균 십사 회 출격 뒤에 죽사옵니다.
— 우리 조종사를 하나 길러 내는 데 이십일 개월이 걸리옵니다. 적은 십일 개월이옵니다. 적의 훈련이 나쁜 것이 아니오라, 적은 죽어도 되는 만큼 사람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 우리가 앞선 것은 시간이지 크기가 아니라고 『만국형세도』가 백 년 전에 적었사옵니다.
— 신들은 오늘 그 문장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였사옵니다.
자원
1936년부터 조선의 진짜 적은 동맹이 아니었다.
석유였다.
페르시아 유전은 개전 첫해에 끊겼다. 육로로 오는 관로를 동맹이 끊었기 때문이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는 지켰다. 그러나 그것을 본토로 실어 오는 것이 문제였다.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동맹 잠수함이 조선 유조선을 사냥했다.
1934년 조선 유조선 손실 십일 척.
1935년 사십칠 척.
1936년 백육십이 척.
1937년 삼백사 척.
조선은 배를 그만큼 만들지 못했다.
1937년 겨울, 조선 본토의 석유 재고가 넉 달분으로 떨어졌다.
그때부터 조선은 석탄에서 짜낸 기름으로 싸웠다. 값은 네 배 반이었고, 그것을 만드는 데 발전량의 이십이 퍼센트가 들어갔다.
안쪽
그리고 안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위권은 이억 삼천만 명이었다. 그중 조선 본토 출신은 사천육백만이었다.
나머지 일억 팔천만이 이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다.
1934년 총동원령.
만주에서 이백사십만, 일본에서 백구십만, 대만에서 오십만, 인도차이나에서 삼백십만, 자바와 보르네오에서 사백육십만.
광산으로, 공장으로, 항구로, 그리고 참호로 갔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종전까지 삼백사십일만 명이다.
1935년 자원 총동원령.
인도차이나와 자바의 쌀을 걷어 본토와 전선으로 보냈다.
1936년과 1937년에 자바에서 기근이 있었다.
사망자 추계는 자료마다 다르다. 가장 낮은 것이 백구십만, 가장 높은 것이 삼백사십만이다.
이 숫자를 조선은 지금까지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측명공이 백 년 전에 물었던 첫 번째 질문 — 이 나라는 자기가 죽인 사람의 수를 정확히 아는가 — 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측명공이 백 년 전에 물었던 첫 번째 질문 — 이 나라는 자기가 죽인 사람의 수를 정확히 아는가 — 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