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유신 제2부 삼척(三陟)
8화제8장 돈(錢)
무오년 봄, 삼척에서 만든 유리 거울 백 장이 한양에 나갔다.
값은 한 장에 스무 냥이었다. 북경에서 사 오는 서양 거울의 삼분의 일이었다.

닷새 만에 다 팔렸다.
그해 가을까지 삼척은 거울 이천 장, 안경 사백 벌, 창유리 천이백 장을 팔았다. 순이익이 십일만 냥이었다.
김조순이 장부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총재. 이제 이 국은 스스로 서기 시작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김조순이 붓을 놓았다.
"저는 이 국이 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국을 누가 갖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한주혁은 그 말의 뜻을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삼십 년 뒤에 알아듣게 된다.
『삼척일지』 제7권, 무오년 이월 십일일
오늘 아이 열둘에게 소의 마마를 넣었다. 팔뚝을 조금 째고 고름을 발랐다. 아이들이 울었다. 어미들은 울지 않았다. 어미들은 이미 아이를 셋씩 잃은 사람들이다. — 기록 서유구
한주혁이 조선에서 이룬 가장 큰 일은 유리도 아니고 쇠도 아니었다.
우두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아는 것 중 가장 값싼 것이었다.
원리는 단순했다. 소의 마마(우두)에 걸린 사람은 사람의 마마(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소의 마마 고름을 사람 팔에 넣으면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
한주혁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항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아무것도 조선에 없었다. 현미경도, 세포 개념도, 면역 이론도.
그러나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소와 칼과 아이뿐이었다.
조선에서 천연두는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불렸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르면 온다고 믿었다. 걸리면 열에 서넛이 죽었고, 살아남아도 얼굴이 얽었다. 조선 사람 대부분이 어릴 때 이 병을 앓았고, 어릴 때 앓지 않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 앓았으며, 어른이 되어 앓으면 더 많이 죽었다.
인두법(人痘法)이라는 것은 있었다. 마마 앓은 사람의 딱지를 말려 코로 넣는 방법이었다. 정약용이 『마과회통』에 그것을 정리해 두었다. 그러나 인두법은 위험했다. 넣은 사람의 이십에 하나가 죽었고, 죽지 않아도 주변에 병을 옮겼다.
우두는 달랐다. 소의 병은 사람에게 약하게만 온다.
한주혁은 그것을 알았지만, 소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넉 달이 걸렸다.
그는 강원도 전역에 사람을 풀었다. — 젖통에 물집이 잡힌 소를 찾으면 상금 열 냥.
여든두 마리가 신고되었고, 그중 일흔아홉은 다른 병이었다. 남은 셋 중 둘은 이미 아물었다.
한 마리가 남았다.
정선 화암 골짜기의 암소였다. 젖 짜는 여인의 손에도 물집이 있었다. 한주혁은 그 여인을 보고 확신했다.
"…아주머니. 마마를 앓으신 적이 있소?"
"없습죠. 저는 어릴 때 안 걸렸습니다요."
"이 마을에 마마가 돌았던 적은."
"재작년에 돌았습죠. 아이가 여덟 죽었습니다요."
"그때 아주머니는."
"…저는 안 걸렸습니다요."
한주혁은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오년 이월, 열두 명의 아이에게 접종했다.
한주혁은 그날 아침에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정당한가.
그가 아는 것은 결과뿐이었다. 이 방법이 통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다른 세계의 통계였고, 이 아이들은 이 세계의 아이들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이 열둘이 죽는다.
그는 그것을 서유구에게 말했다.
서유구가 물었다.
"총재. 여쭙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이 아이들 중 몇이 죽습니까."
"…열에 셋쯤."
"그러면 하십시오."
"…"
"총재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이 아이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총재의 손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총재의 마음이 편하고 불편한 문제이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주혁은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열두 명 중 열한 명이 가볍게 열이 났다가 나았다. 한 명이 심하게 앓았으나 살았다.
여섯 달 뒤, 삼척에 마마가 돌았다.
접종한 열둘 중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같은 마을 접종하지 않은 아이 백열넷 중 서른한 명이 걸렸고 아홉 명이 죽었다.
한주혁은 그 숫자를 종이에 적어 한양으로 보냈다.
세 줄이었다.
— 넣은 아이 열둘, 걸린 아이 영(零), 죽은 아이 영.
— 안 넣은 아이 백열넷, 걸린 아이 서른하나, 죽은 아이 아홉.
— 이것이 재는 것이옵니다, 전하.
정조는 그 종이를 어전에서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읽고 나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의정 심환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은 저 삼척의 국이 나라 재물을 좀먹는다 하여 세 번 상소하였사옵니다."

"알고 있소."
"오늘 신이 네 번째로 아뢰겠사옵니다."
정조가 눈썹을 들었다.
심환지가 절했다.
"신의 손자가 지난해 마마로 죽었사옵니다. 세 살이었사옵니다."
"…"
"저 방법을 팔도에 펴소서. 신이 앞장서겠사옵니다."
무오년 시월, 종두청(種痘廳)이 설치되었다.
이 년 만에 팔도에 우두종인(種人)이 사백 명 배치되었다. 오 년째에 접종을 받은 아이가 삼십만을 넘었다.
기미년(1799년) 겨울, 전국에 역병이 돌았다.
실제 역사에서 이 해에 조선에서는 십이만 명이 죽었다. 감기와 역병이 겹쳤고,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 관을 짤 나무가 모자랐다고 실록은 적었다.
이 세계에서도 십일만 명이 죽었다.
우두는 천연두만 막았을 뿐, 다른 역병은 막지 못했다.
그러나 삼척부와 강릉부의 사망자는 다른 고을의 팔분의 일이었다.
이유는 우두가 아니었다.
한주혁이 두 해 전부터 시행한 세 가지 때문이었다. 우물을 뒷간에서 서른 걸음 떨어뜨릴 것. 물을 끓여 마실 것. 아픈 사람이 나온 집을 표시하고 열흘간 왕래를 끊을 것.
그것뿐이었다.
정약용이 그 보고를 받고 삼척으로 내려왔다.
그가 한주혁에게 물은 첫 마디가 이것이었다.
"…물을 끓이면 왜 사는 것이오."
"모릅니다."
"모른다니."
"모릅니다. 물속에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있어서라고 저는 배웠습니다만, 그것을 여기서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모릅니다."
정약용이 그를 오래 보았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아는 것이오."
"끓이면 산다는 것을 압니다."
"이유를 모르는데 어찌 안다 하오."
한주혁이 대답했다.
"참판. 사람은 이유를 몰라도 삽니다. 이유를 알아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나중에 누가 알아낼 겁니다. 저는 그 사이에 죽을 사람들이 아까울 뿐입니다."
정약용은 그날 밤 삼척에 남았다.
그리고 이 년을 남았다.
『동래부 계본』 정사년 구월 (실제 사건)
이양선 한 척이 용당포에 닿았사옵니다. 배의 길이가 십팔 파(把)요 돛대가 셋이옵니다. 사람은 사십여 명인데 코가 높고 눈이 푸르옵니다. 글을 써서 물으니 알아볼 수 없는 글자이옵고, 다만 지도를 그려 보이는데 저희 나라가 서쪽 끝에 있다 하옵니다. 물과 땔감을 얻어 아흐레 만에 떠났사옵니다.
영국 배는 아흐레 만에 떠났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남았다.
얀 데 브리스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프로비던스호의 선원이 아니라, 바타비아에서 붙잡혀 항해장 보조로 끌려온 처지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그 무렵 전쟁 중이었고, 그는 사실상 포로였다.
용당포에서 그는 배를 버렸다.
밤에 헤엄쳐 나와 갈대밭에 숨었고, 사흘 뒤 굶어서 마을에 기어 나왔다가 붙잡혔다. 동래부사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청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으나 청까지 보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이 자는 청 사람이 아니었다.
한주혁이 그 보고를 받은 것은 두 달 뒤였다.
그는 즉시 삼척에서 사람을 보냈다.
얀은 서른다섯이었고 앞니가 두 개 없었으며, 처음 삼척에 왔을 때 사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주혁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얀은 영어를 알아들었으나 서툴렀다. 네덜란드어는 한주혁이 몰랐다. 둘은 결국 라틴어 단어 몇 개와 그림으로 대화했다.
한주혁이 종이에 유리병을 그렸다.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혁이 그 옆에 목이 긴 플라스크를 그렸다. 그리고 레토르트를, 냉각관을 그렸다.
얀의 눈이 커졌다.
그가 손을 뻗어 붓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냉각관 옆에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나선형이었다. 한주혁이 그린 직선 냉각관보다 훨씬 긴 나선.
한주혁이 그를 보았다.
얀이 서툰 영어로 말했다.
"Longer. More cold. Better."
한주혁은 그 자리에서 이 사람의 가치를 알았다.
그가 아는 것은 개념이었다. 이 사람이 아는 것은 손이었다. 유리를 불어 어느 두께로 만들어야 열충격에 안 깨지는지, 냉각관을 몇 번 감아야 응축이 되는지, 그것은 물리 이론이 아니라 삼백 년 유럽 유리공방의 축적이었다.
한주혁은 그것을 통째로 얻었다.
강수(强水)는 황산이었다.
한주혁이 그것을 두 번째 과제로 삼은 것은 그것이 모든 화학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황산이 있으면 소다를 만들 수 있고, 소다가 있으면 유리와 비누와 표백분을 만들 수 있고, 표백분이 있으면 직물을 대량으로 표백할 수 있다. 황산이 있으면 금속을 씻을 수 있고, 전지를 만들 수 있고, 화약의 질산을 뽑아낼 수 있다.
방법은 연실법(鉛室法)이었다. 납으로 방을 만들고, 그 안에서 유황과 초석을 태워 나온 김을 물에 녹인다. 영국에서 오십 년 전에 나온 방법이었다.
문제는 셋이었다.
첫째, 납. 조선에 연광(鉛鑛)은 있었다. 원덕에도 있었다. 그러나 넓은 납판을 만들어 이어 붙이는 기술이 없었다. 얀이 그것을 가르쳤다. 납은 무르니까 두들겨 펴고 녹여 이어 붙일 수 있다. 여섯 달이 걸렸다.
둘째, 초석. 조선의 화약은 취토법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집 부뚜막과 마루 밑 흙을 긁어 오줌과 재를 섞어 졸이는 방식이었다. 수율이 처참했다. 백 근의 흙에서 초석 한 근이 나올까 말까였다.
한주혁은 그것을 바꿀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인공 초석전(硝石田)을 만드는 방법 — 거름과 재와 석회를 쌓아 이 년간 썩히는 — 을 대략 기억해냈고, 도계 뒷산에 그것을 시작했다. 결과는 이 년 뒤에나 나온다.
셋째가 진짜 문제였다.
유황.
셋째가 진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