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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제4장 희정당(熙政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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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어찰첩』 을묘년 칠월 (심환지에게)

요사이 괴이한 자를 하나 얻었다. 경도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대신들이 죽이자 하고 검서관 놈은 살리자 한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두겠다. 그자가 요망하면 죽이면 그만이나, 요망하지 않으면 그때는 죽이는 것이 더 큰 죄가 된다. 경은 어찌 보는가. 이 편지는 보고 태우라. 뒤죽박죽이 되기 전에.
정조유신 4화 제4장 희정당(熙政堂) — 헤더컷

임금은 생각보다 작았다.

한주혁이 희정당 뜰에 엎드렸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마루에 앉은 사람은 마흔 셋이었고, 살이 붙어 있었으며, 얼굴이 붉었다. 그림에서 본 근엄한 초상과 달랐다. 눈 밑이 검었다. 잠을 못 자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고개를 들라."

한주혁은 고개를 들었다.

정조가 그를 보았다. 아주 오래 보았다. 그러다 대뜸 말했다.

"머리를 그렇게 깎고 다니면 춥지 않느냐."

한주혁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춥사옵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하였는데."

"소인이 자란 곳에서는 다들 깎사옵니다."

"다들?"

"임금도 깎사옵니다."

정조의 눈썹이 올라갔다.

"임금이 있느냐."

"없사옵니다."

"방금 임금이 깎는다 하지 않았느냐."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있사오나 임금은 아니옵고, 백성이 뽑사옵니다. 다섯 해마다 뽑고, 다섯 해가 지나면 물러나옵니다."

마루 아래 늘어선 승지들 사이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정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물러나지 않으면."

"백성이 끌어내리옵니다. 소인이 살던 때에도 한 번 그리하였사옵니다."

"죽이느냐."

"가두옵니다."

정조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 나라에 왕이 없어진 것이 언제냐."

"…소인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옵니다."

"어떻게 없어졌느냐."

한주혁은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망설였다.

이 대화의 방향을 그는 통제할 수 없었다. 통제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가 만나본 어떤 심사위원보다 빨랐다.

"…나라가 망하면서 없어졌사옵니다."

"조선이 망하느냐."

"망하옵니다."

승지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전하! 이 자를—"

"앉으라."

정조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승지가 앉았다.

"언제 망하느냐."

"백열다섯 해 뒤이옵니다."

"누구에게."

한주혁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는 그 순간 이후로 사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순간을 되짚게 된다. 다르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침묵할 수 있었을까. 청나라라고 거짓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왜(倭)이옵니다."


정조는 웃지 않았다.

한주혁이 예상한 반응은 셋이었다. 격노, 조소, 무시. 그중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정조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전하."

"어떻게 망하느냐 물었다. 군사가 오느냐. 배가 오느냐. 성이 떨어지느냐. 말하라."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러면."

"…문서로 망하옵니다."

한주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군사가 오기는 오옵니다. 그러나 성을 부수지는 않사옵니다. 대궐에 들어와 붓과 도장을 내놓으라 하옵니다. 조약을 맺자 하옵니다. 처음에는 통상이라 하고, 다음에는 보호라 하고, 마지막에는 병합이라 하옵니다. 스무 해에 걸쳐 천천히 하옵니다. 그동안 조정은 계속 있사옵고, 임금도 계속 있사옵고, 벼슬아치도 그대로 벼슬을 사옵니다. 다만 결정을 못 하게 되옵니다."

"…"

"군대를 먼저 뺏고, 그다음에 외교를 뺏고, 그다음에 재판을 뺏고, 마지막에 이름을 뺏사옵니다."

"이름?"

"성(姓)을 갈게 하옵니다. 조선 사람에게 왜의 성을 쓰게 하옵니다. 말도 못 쓰게 하옵니다. 학당에서 조선말을 쓰면 매를 때리옵니다."

희정당이 조용해졌다.

바람에 창호지가 떨렸다.

"…얼마나 가느냐."

"서른여섯 해이옵니다."

"그 뒤에는."

"놓여나옵니다. 그런데 놓여나면서 둘로 갈라지옵니다. 위와 아래로. 그리고 오 년 뒤에 저희끼리 싸우옵니다. 삼 년을 싸우고, 삼백만이 죽사옵니다."

"삼백만."

정조유신 4화 제4장 희정당(熙政堂) — 전환컷

"삼백만이옵니다."

정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그러고 있었다.

한 식경쯤 지나서 그가 손을 내리고 말했다.

"…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옵니다."

"그런데 참이라 치자. 그러면 네가 여기 온 것은 무엇 하러 왔느냐."

"모르옵니다."

"모른다?"

"소인은 오려고 온 것이 아니옵니다. 던져진 것이옵니다. 왜 하필 이때인지, 왜 하필 조선인지 소인은 모르옵고, 알아낼 방법도 없사옵니다."

"그러면 돌아갈 방법도 모르겠구나."

"…모르옵니다."

정조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코로 내쉰 숨이었다.

"솔직하구나. 요망한 자들은 그런 것을 다 안다고 한다."

"소인이 아는 것은 하나뿐이옵니다."

"무엇이냐."

한주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임금의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 무엄한 짓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조선이 망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옵니다. 조선은 그때도 인구가 이천만이었고 땅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사옵니다. 조선이 망한 것은 만들 줄 몰라서이옵니다."

"만들 줄 몰라?"

"왜가 조선을 삼킨 것은 왜가 강해서가 아니라, 왜가 마흔 해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옵니다. 마흔 해이옵니다, 전하. 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보다 나을 것이 없사옵니다. 왜는 마흔 해 뒤에 서양을 보고 놀라서, 삼십 년을 죽을힘을 다해 배웠사옵니다. 그것뿐이옵니다."

"…"

"조선은 그때 배우지 않았사옵니다. 배우려 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러나 늦었사옵니다."

정조가 물었다.

"지금은 안 늦었느냐."

"지금이 가장 이른 때이옵니다."

한주혁은 이마를 땅에 댔다.

"서양은 지금 막 시작하였사옵니다. 영길리(英吉利)라는 나라에서 쇠와 불로 기계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 삼십 년쯤 되었사옵니다. 아직 아무도 이기지 못했사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조선은 마흔 해 뒤진 것이 아니라 서른 해 뒤진 것이옵고, 나아가 앞설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고 앞으로 스무 해 동안 서양은 저희끼리 큰 전쟁을 하옵니다. 아무도 동양을 보지 않사옵니다. 그 스무 해가 조선에 주어진 전부이옵니다."

정조가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언제 죽느냐."


승지들이 얼어붙었다.

한주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묻지 않았느냐."

"…아뢸 수 없사옵니다."

"어찌하여."

"아뢰면 전하께서 소인의 말대로 사시게 되옵니다. 그것은 소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느냐."

"어리석음이 아니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 알면 다르게 삽니다. 그것이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 소인이 알 수 없사옵니다."

"…"

"그리고 전하."

한주혁이 이마를 들었다.

"소인이 아는 것은 소인이 살던 세계의 일이옵니다. 소인이 여기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 세계는 더 이상 오지 않사옵니다. 소인이 오늘 이 자리에서 전하께 아뢴 말 한마디로 이미 달라졌사옵니다. 그러니 소인이 아는 앞일은 앞일이 아니오라, 가지 않기로 한 길이옵니다."

정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네 말은 다 소용이 없구나."

"소용이 있사옵니다. 지도는 소용이 있사옵니다. 다만 그 지도에 그려진 낭떠러지는, 우리가 피하면 낭떠러지가 아니게 되옵니다."

정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루 끝까지 걸어와 한주혁을 내려다보았다.

"한생."

"예."

"너는 지금 나에게 나라를 통째로 뒤집자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느냐."

"아옵니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느냐."

한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하고 계시옵니다. 규장각도, 장용영도, 화성도 그것이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그 힘으로 조정을 바꾸려 하시옵고, 소인은 그 힘으로 땅을 바꾸자 하는 것이옵니다."

정조가 그 말에 오래 멈췄다.

"…땅."

"조정은 사람이 바뀌면 되돌아가옵니다. 전하께서 세우신 것들은 전하께서 가시면 하루아침에 없어지옵니다. 소인은 그것을 보았사옵니다."

"…"

"그러나 땅에 박은 것은 되돌아가지 않사옵니다. 광산은 메울 수 없고, 길은 지울 수 없고, 배운 손은 잊히지 않사옵니다. 신하를 만드시지 말고 장인을 만드소서. 그것은 아무도 혁파하지 못하옵니다."

정조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서,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내일 다시 오라. 씻기고 옷을 입혀서 오게 하라."

그리고 문지방을 넘기 직전에 덧붙였다.

"…그리고 매질은 그만두라 이르라. 등이 터진 자와는 이야기가 재미없다."

'…그리고 매질은 그만두라 이르라. 등이 터진 자와는 이야기가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