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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제36장 왜(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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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문부성 검정 역사교과서』 (2019년판) 중학교 과정, 제7장 도입부

— 우리 나라는 1826년부터 1940년까지 백십사 년 동안 조선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 시기를 우리는 「경위기(經緯期)」라 부른다.

— 이 시기를 서술하는 것은 어렵다. 이 시기에 우리 나라는 근대 국가가 되었고, 문맹이 사라졌고, 평균 수명이 서른둘에서 예순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 말로 배우지 못했고, 우리 이름을 반쯤 잃었고, 우리 젊은이 팔십구만 명이 남의 전쟁에서 죽었다.

이 두 문단이 다 참이다. 여러분은 이 두 문단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정조유신 26화 제36장 왜(倭) — 헤더컷

이 세계에서 일본은 조선이 되지 못한 조선이다.

하나 — 마흔 해 늦었다

1826년 대마도 앞바다에 조선 함대 열한 척이 나타났을 때, 일본은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의 역사에서 일본은 1853년에 페리를 만났고, 그때는 이미 난학이 칠십 년 축적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서양이 멀었다.

이 세계에서 일본을 두드린 것은 서양이 아니라 이웃이었다.

이웃은 가깝다. 가까운 이웃에게는 시간을 벌 수 없다.


『조일수호조규』(1826) 여덟 조는 일본을 조선의 자원 창고로 만들었다.

유황과 동(銅)의 무역이 조선 상관을 거쳤다. 값은 조선이 정했다.

1830년부터 1880년까지 오십 년 동안, 일본에서 조선으로 나간 유황은 연평균 이십팔만 근이었다. 대금은 조선 제품으로 지불되었다. 유리와 약과 무명이었다.

즉 일본은 원료를 주고 완제품을 받았다.

식민지의 정의다. 다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둘 — 흉내

일본의 반응은 세 단계였다.

1826~1855, 분노. 존왕양이 운동이 이 세계에도 있었다. 다만 대상이 서양이 아니라 조선이었다. 구호는 「양조(攘朝)」였다.

1855~1882, 흉내. 아오키 겐사이가 1838년에 예언한 그대로였다. 미워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미워했다.

일본은 이 시기에 놀라운 일을 해냈다. 조선 유학생 파견, 번교 개혁, 산업 육성. 1870년대 일본의 성장률은 조선보다 높았다.

문제는 출발선이었다.

1855년 일본의 공업 생산은 조선의 십칠 분의 일이었다. 매년 조선보다 이 퍼센트포인트씩 빨리 자라도 따라잡는 데 백오십 년이 걸린다.

1882~1901, 전쟁과 병합.

임오년(1882) 전쟁의 명목은 조선 상관 습격 사건이었다. 실제 이유는 관세였다. 일본이 조선 제품에 관세를 매기려 했고, 조약 제6조가 그것을 금하고 있었다.

넉 달 만에 끝났다.

일본군은 잘 싸웠다. 지휘도, 사기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조선군은 무전기를 썼고, 강선포가 두 배 멀리 나갔고, 부상자가 감염으로 죽지 않았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 전훈보고』 1882년.

— 우리가 진 것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 병사는 잘 싸웠다.
— 우리가 진 것은 저들이 우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저들은 우리 부대가 어디 있는지 알았고 우리는 저들 부대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 이것은 전술로 극복되지 않는다.

1884년 『한성조약』, 보호국화. 1901년 병합.

셋 — 그리고 일본이 조선보다 더 조선다워졌다

병합 이후 삼십 년이, 이 세계 동아시아사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일본은 저항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십오 년쯤 저항하다 그만두었고, 그 뒤로는 경위권 전체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역이 되었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19011930
문해율41%96%
평균 수명38세59세
인구 대비 이공계 고등교육자조선 본토의 0.3배조선 본토의 1.4배
제국 과학원 외지 출신 정원 중 일본 비율51%

일본은 조선 본토보다 더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배운 것으로 조선 제국을 운영했다.

인도차이나 총독부 국장급 열아홉 중 열하나.
자바 민정부 과장급 이상 백사십 중 서른아홉.
남양 인광석 채굴의 노무 관리 체계 설계자.
보르네오 고무 농원의 할당 제도 입안자.

경위권의 현지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조선인 총독이 아니었다. 그 밑의 일본인 국장이었다.

넷 — 왜 그랬는가

이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백 년 동안 다툰 문제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아오키 겐이치로가 1903년 나가사키 고등공업학교 졸업식에서 한 말이다.

— 제군은 조선인보다 더 조선적인 관리가 되기 위해 이 학교를 나선다.

— 왜 그런가. 제군이 조선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제군에게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우리는 졌다. 진 나라의 젊은이가 자기를 증명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긴 나라의 자(尺)로 재어서, 그 자로 이기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자로 이기려면 그 자를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자를 미워하면서 그 자로 일등을 할 수는 없다.

— 그래서 우리는 조선을 미워하기를 그만두었다. 미워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가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제군. 이것이 우리가 치른 진짜 대가다. 우리는 땅을 잃은 것도, 말을 잃은 것도 아니다.

— 우리는 미워할 자유를 잃었다.

다섯 — 1938

그리고 1938년 칠월 십칠일, 수라바야에 폭탄이 떨어졌다.

죽은 이십육만 중 일본 출신이 이만 팔천이었다. 기술자와 관리와 그 가족이었다. 경위권에서 가장 성공한 일본인들이 거기 있었다.

임시 자유평의회 부의장 아오키 겐타로가 그 안에 있었다.


정조유신 26화 제36장 왜(倭) — 전환컷

칠월 이십사일, 나가사키 고등공업학교 교수 사십일 명이 연명 사직서를 냈다. 사유란은 비어 있었다.

팔월 십일일, 일본 서부의 육군 사단 셋이 명령 수령을 거부했다.

팔월 이십사일, 제국 화학원장 아오키 도모에가 죽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조선 제국의 행정이 멈췄다.

일본인 관리가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선 제국이 무너진 진짜 이유다.

동맹의 함대도 아니고 봉기군의 총도 아니었다.

제국을 굴린 사람들이 그만둔 것이다.

여섯 — 그 뒤

1940년 『마카오 협정』 제2조로 일본은 독립했다.

백십사 년 만이었다.


독립 후 일본이 겪은 일은, 이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기묘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자기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는데, 그 나라를 세울 사람들이 전부 조선 제국의 관리였다.

관료도, 기술자도, 의사도, 교사도, 장교도.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라가 굴러가지 않았다.

숙청하지 않으면, 독립 일본은 조선 제국이 남긴 몸으로 서는 것이었다.

일본은 두 번째를 골랐다.

1946년 일본 정부 국장급 이상 이백열한 명 중 백구십사 명이 조선 제국의 관리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 일본의 성격을 만들었다.

2027년 현재 일본은 조선보다 인구가 두 배 많고, 경제 규모가 일 점 육 배이며, 과학기술 지표에서 조선을 앞선다.

일본의 제도는 조선의 제도와 거의 똑같다. 의정원과 비슷한 의회, 통계원과 비슷한 통계청, 국립과학원과 비슷한 연구 체계, 『공장 보호 조목』을 그대로 옮긴 노동법.

『삼척약조』 다섯 조를 그대로 쓰는 연구 기관이 일본에 열두 곳 있다.

일본어로 번역된 『만물지서』는 일본에서 조선에서보다 더 많이 팔렸다.


2019년, 일본 문부성 검정 역사교과서 제7장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 어떤 이는 우리가 조선에 배운 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직하지 않다. 우리가 오늘 쓰는 것의 대부분이 그 시기에 왔다.

— 어떤 이는 그러므로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정직하지 않다. 우리 젊은이 팔십구만 명이 남의 전쟁에서 죽었고, 우리 도시 하나가 우리를 지배하던 나라의 폭탄에 사라졌다.

— 우리는 여러분에게 셋째 길을 권한다.

정확히 기억하라.

— 무엇을 받았는지 정확히 세고,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세라. 둘을 상계하지 말라. 상계하면 둘 다 사라진다.

— 이것은 우리가 조선에서 배운 방법이다.

— 우리는 이 방법으로 조선을 기억할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갚는 방식이다.


『만물지서』 중권 제이십이권 「셈틀」 마지막 장

부디 이 기계를 만들기 전에 그것을 누가 쓰는지를 먼저 정하라. 순서를 바꾸면 늦는다.

조선이 그 순서를 바꾼 것은 무진년(1868)이었다.


시작은 인구조사였다.

조선은 십 년마다 전국의 사람을 셌다. 정묘년(1867) 조사는 본토와 만주와 대만을 합쳐 삼천구백만 명이었고, 그것을 집계하는 데 십일 년이 걸렸다.

다음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 앞 조사의 집계가 끝나지 않았다.

통계원장 남정후가 의정원에 올린 보고서의 한 문장이 유명하다.

— 신들은 십 년마다 십일 년치 일을 하고 있사옵니다. 이대로 가면 조선은 영원히 십 년 전의 자기 모습만 알게 되옵니다.


해법은 『셈틀』 제칠항에 있었다.

— 시키는 일은 구멍으로 적는 것이 편하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 있고 없음으로 적는다.

무진년, 계산소 국원들이 사람 하나를 두꺼운 종이 한 장으로 바꿨다.

가로 열두 칸, 세로 스물네 칸. 이백여든여덟 자리. 나이·성별·사는 곳·직업·혼인 여부·자식 수·앓은 병·글을 아는지·부리는 힘이 있는 집인지가 구멍의 있고 없음으로 적혔다.

그 종이를 기계에 넣으면 바늘이 내려온다. 구멍이 있는 자리에서는 바늘이 통과해 아래의 수은 그릇에 닿고, 전기가 흘러 해당하는 눈금이 하나 올라간다.

한 사람 세는 데 이 초가 걸렸다.

무진년 조사는 십일 년이 아니라 일 년 사 개월에 끝났다.

미국의 홀러리스가 같은 원리의 기계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1890년이다. 스물두 해.

미국의 홀러리스가 같은 원리의 기계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1890년이다. 스물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