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유신 제1부 낙하(落下)
2화제1장 도계(道溪)
한 시진 뒤, 화전민 넷이 몽둥이와 낫을 들고 돌아왔다.
한주혁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곳이 없었고, 도망치면 상황이 나빠진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는 두 손을 들었다. 그가 아는 만국 공통의 신호였다. 그러나 조선의 화전민에게 두 손을 드는 것은 아무 뜻도 아니었다.

김덕수가 물었다.
"뉘시오. 어디서 왔소."
한주혁은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때 그는 이미 세 가지 관찰을 마친 뒤였다.
소나무는 불균질했다. 아름드리와 어린 나무가 뒤섞여 있었고 간벌한 흔적이 없었다.
계곡물은 맑았다. 지나치게 맑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어떤 계곡물도 그렇게 맑지 않았다. 그는 그 물을 손으로 떠서 보았고, 부유물이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선 네 사람의 입 안이 보였다. 김덕수는 위 앞니 하나가 없었고 나머지가 짙게 착색되어 있었다. 그 옆 사내는 어금니 쪽이 검게 무너져 있었다. 넷 중 누구도 충전물이 없었다. 금도, 아말감도, 레진도. 한 사람도.
한주혁은 그 순간 자기 가설을 폐기했다.
환각은 이렇게까지 성실하지 않다. 환각은 치아를 만들지 않는다.
"저는…"
그는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그날 한 말 중에 유일하게 온전한 사실이었다.
김덕수가 다시 물었다.
"어느 고을 사람이오."
"…모르겠습니다."
"성이 무어요."
"한가입니다."
"본관은."
한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본관을 몰랐다. 아버지가 말해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청주였던가 곡산이었던가. 그는 그런 것을 기억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덕수의 얼굴이 굳었다. 본관을 모르는 사내는 조선에 없었다. 노비도 자기가 어느 집 종인지는 알았다.
"손을 보이시오."
한주혁은 손을 폈다. 그것이 실수였다.
굳은살이 없었다. 마흔일곱 먹은 사내의 손인데 손바닥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 손톱이 정돈되어 있었다. 손등이 희었다. 조선에서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양반뿐이었고, 양반은 산속을 혼자 걷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양반은 상투를 잘라 다니지 않았다.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한주혁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더 했다.
날이 저물고 산속이 추워지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켰다.
불이 붙었다.
부싯돌 소리도 없이, 부시도 없이, 화섭자도 없이, 사내의 손끝에서 파란 불이 솟았다. 그리고 사내가 손가락을 떼자 불이 꺼졌다. 다시 눌렀다. 다시 붙었다.
김덕수는 뒤로 넘어졌다. 옆에 있던 자는 낫을 놓쳤다. 돌쇠는 소리를 질렀다.
한주혁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삼 초 뒤에 깨달았다.
그는 라이터를 놓았다. 두 손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에 그는 헛간에 묶였다.
새끼줄이었다. 손목을 앞으로 모아 감고 기둥에 이어 묶었는데, 매듭이 서툴러서 조금 움직이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풀지 않았다. 지금 도망치면 산속에서 죽는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오월이라도 태백산맥의 밤은 영상 오 도를 밑돌았고, 그는 물도 식량도 지도도 없었다.
벽 틈으로 바깥의 말소리가 들렸다.
"독각귀요. 다리 하나로 다닌다는…"
"두 다리로 걷습디다."
"그럼 왜인가."
"왜인이 조선말을 하겠소."
"천주학쟁이 아니오? 요새 조정에서 서양 신부를 잡는다고 난리라던데."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한주혁은 그 침묵을 들었고,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는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볏짚 사이로 별이 보였다.
별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그날 그를 가장 무섭게 한 것이었다. 광해(光害)가 없는 하늘이었다. 그는 그런 하늘을 칠레의 관측소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은하수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그는 별자리를 찾았다. 오월 밤하늘. 북두칠성이 높이 떠 있었고, 목동자리 아르크투루스가 남중 근처에 있었다. 그는 세차운동을 떠올렸다. 이만 육천 년 주기. 세기 단위로는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다. 별로는 연대를 잴 수 없었다.
그러나 잴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손목을 비틀어 시계를 보았다. 이십일 시 사십이 분. 그리고 북극성의 고도를 눈대중했다. 대략 삼십칠 도. 위도 삼십칠 도. 강원도 남부. 맞았다.

한주혁은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문제는 언제에 있는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밤이 끝나기 전에, 자기가 그것을 알아낼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저 사람들에게 임금의 이름을 물으면 된다.
『강원감영 계본(啓本)』 을묘년 유월 초이일
삼척부에서 잡아 올린 자는 나이 사십칠이라 스스로 이르되 본관을 대지 못하고 호패가 없사옵니다. 머리를 깎았으되 승려의 예가 아니옵고, 옷은 조선의 제도가 아니오나 왜의 것도 아니옵니다. 몸에 지닌 것이 아홉 가지인데 그 쓰임을 신들이 알지 못하옵니다. 근자에 서양 신부가 잠입하였다는 하교가 있었던바, 이 자가 그 무리인지 아닌지를 신들의 소견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사옵니다. 의금부로 이송함이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임금의 이름을 묻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조선에서 임금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주혁이 "지금 임금이 누구요"라고 물었을 때 김덕수는 그를 미친 사람 보듯 보았고, 그 뒤로 사흘 동안 아무도 그와 말을 섞지 않았다.
결국 알아낸 것은 삼척부 관아에 끌려간 다음이었다.
문서를 읽는 아전이 소리 내어 날짜를 불렀다.
"을묘년 오월 십칠일."
한주혁은 그 여섯 글자를 붙들었다.
을묘. 육십갑자. 그는 머릿속으로 셈을 시작했다. 을묘년은 육십 년마다 돌아온다. 1495, 1555, 1615, 1675, 1735, 1795, 1855, 1915. 그가 본 것들 — 상평통보로 보이는 엽전, 백자 사발, 무명옷, 광해 없는 하늘, 총이 없는 포졸 — 로 좁히면 열여덟 세기 후반이거나 열아홉 세기 전반이었다.
1795년 아니면 1855년.
그는 두 번째 실마리를 찾았다. 사흘 뒤 관아 마당에서 죄인들을 다스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옆에 묶인 늙은 좀도둑에게 물었다.
"영감. 지금 임금께서 몇 해나 자리에 계셨소."
늙은이가 눈을 흘겼다.
"자네 정말 어디서 왔나. 스무 해 되셨지. 을미년에 오르셨으니."
한주혁은 손가락을 셌다. 즉위 스무 해째. 을묘년.
정조였다.
그는 몸이 식는 것을 느꼈다.
1795년. 정조 19년. 화성이 지어지고 있고,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았고, 정약용이 서른셋이고, 채제공이 살아 있고—
—그리고 정조가 다섯 해 뒤에 죽는다.
한주혁은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정조에 대해 아는 것은 교양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다. 규장각, 화성, 수원, 탕평, 정약용,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 뒤에 세도정치가 오고, 백 년 뒤에 나라가 없어진다.
백 년.
그는 그 숫자를 손바닥에 썼다. 손가락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백 년 뒤에 이 나라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의 백 년은, 그가 배운 바로는,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계가 증기와 철과 전기로 뒤집히는 동안 조선은 그것을 몰랐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지금 그 백 년의 시작점에 앉아 있었다.
손목이 묶인 채로.
삼척부사 신광우(申光祐)는 종삼품 도호부사였고, 부임한 지 아홉 달 되었으며, 이 일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성가신 일이 되리라는 것을 첫날에 알아차렸다.
이양인(異樣人)이었다. 그것도 조선말을 하는 이양인.
그는 그자가 지닌 물건 아홉 가지를 상 위에 늘어놓게 했다.
첫째, 얼굴에 걸치는 유리 두 개. 은빛 나는 쇠로 테를 둘렀는데 쇠가 놀랄 만큼 가벼웠다. 신광우는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은도 놋도 아니었다. 무게가 나무 같았다.
둘째, 손목에 차는 자명종. 손톱만 한 크기인데 안에서 바늘 셋이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았다. 태엽을 감는 구멍이 없었다. 흔들면 안에서 무언가 도는 소리가 났다.
셋째, 불을 내는 물건. 이것이 문제였다.
넷째, 쇠로 된 자. 눈금이 촘촘한데 그 눈금이 조선의 어떤 척도와도 맞지 않았다.
다섯째,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하는 집게 같은 것. 물건을 물리면 옆에 눈금이 나타났다.
여섯째, 검은 돌 다섯 개. 손톱만 한데 서로 붙었다. 억지로 떼면 다시 달라붙었다. 쇠붙이를 갖다 대면 딸려왔다. 자석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신광우가 평생 본 어떤 지남석보다 강했다. 그는 그것 하나로 못을 열 개나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일곱째, 은빛 실 한 뭉치. 무른데 끊어지지 않았다.
여덟째, 검고 매끄러운 판때기.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자는 그것을 빼앗길 때 처음으로 저항했다.
아홉째, 투명한 주머니에 든 흰 알갱이들. 약이라 했다.
신광우는 사흘 밤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자는 왜인이 아니다. 왜의 물건은 왜관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청의 물건도 아니다. 서양의 물건은 그가 본 적이 없으나, 소문으로 들은 자명종과 천리경과 유리거울을 다 합쳐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물건들은 똑같았다.
넷째 물건의 눈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간격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다섯째 물건의 아가리는 벌리고 오므릴 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첫째 물건의 유리 두 알은 서로 완벽하게 같았다.
조선의 어떤 장인도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 조선의 장인이 만든 것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것이 손의 흔적이고, 좋은 장인일수록 그 다름이 아름답다.
이 물건들에는 손의 흔적이 없었다.
신광우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만 등이 서늘했다.
신광우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만 등이 서늘했다.